Ernst Mayr 가 보는 종의 분화 II (생물체간의 틈)

자연에서 직접 활동하는 과학자들은 어떤 서식지에서 사는 생물체건 서로 뚜렷히 구별되는 군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의심하기 어려운데 이것은 과나 속 같은 높은 분류단위로는 통하지 않는 현실이다.  생물체의 종 간에 형태적 연속성이 없다 (the idea of organic discontinuity)는 생각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린네의 분류학에도 나타나며 다아윈조차 그의 책 “인류의 혈통” (The descent of man: 1871)에서 “두개의 아주 가깝게 유사한 형태들을 연결시키는 변종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상호교잡으로 섞이지 않는 사실이 그들의 특이한 구분이 되는 기준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생물학자들은 이러한 불연속성이라는 것이 순전히 사람의 지각의 주관적 해석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대들고 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가 놀랍게도 할데인 (J.B.S. Haldane)으로 그는 한 종의 개념을 우리의 언어적인 습성과 신경적인 작용원리에 대한 양여이며 특정한 종을 구분한다는 논리는 생물학적 논쟁이 아니라 언어적인 논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종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식물에서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종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분류학자(Sokal과 Crovello 1970, Misler와 Donoghue 1982, Nelson 1989)들과 식물학자들(Raven 1976, Levin 1979) 사이에 특히 인기가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다아윈이 제시한 것 이상의 종분화 이론은 필요없다.

종의 실존의 인식이 생물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열쇄이며 이러한 실존을 진화론자들에게 심어준 것은 주로 메이어와 도브잔스키였다: 메이어는 “박물학자들이 지역 종 (local species)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요청한 후에야 종 간의 틈(gap)을 연결하는 문제가 생겼으며 그럴 때만이 종이란 진화의 단위인지 아니면 다른 종류의 단위인지의 문제가 대두된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강조되는 부분이 지역적 (local)이란 단어이다. 그 이유는 메이어도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지역 종 간의 형태적) 불연속성들이 동소적 그룹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고 지리적 집단들을 포함시킬 경우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역적이고 고립된 집단이 그를 이소적 종분화 이론 쪽으로 유도한 주요 원인이었다.

메이어는 종 분화에 관한 그의 첫째 논문에서 조류 분류학의 증거를 이용하여 종의 실존에 대하여 길게 토의하였다. 그리고 “종의 분류학과 기원” (Systematics and the origin of species)에서 더 길게 토의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도브잔스키는 “종의 유전학과 기원” (Genetics and the origin of species)이라는 책의 서두에서. “ 뚜렷히 구분되는 군들은 그 구조가 간단한 것부터 복잡한 것 모두를 포함하여  동물이나 식물 모두에서 발견된다. 뚜렷하게 다른 군들이 형성되는 것은 너무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이것이 생물 다양성의 기본적인 특성이라고 간주된다”라는 선언형식(fiat)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

이 문제의 중요성과 겉으로 드러내어 비판하는 학자들의 수가 많지 않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한 지역의 종의 실존을 연구한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현재까지의 연구는 두 범주로 나뉜다. 첫째는 서구 분류학자들에 의하여 묘사된 종과 거주민들에 의하여 인식되고 있는 종 간에 대단한 일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치성은 지리적으로 표본이 제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새 (birds)나 식물 모두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증거는 모든 사람을 다 확신시키지는 못했다. 리들리(Ridly)는 “그러나 사람들이 자연에서 종을 같은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 이름을 부르는 범주를 벗어나서 그 종이 실존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것이 나타내는 것은 모든 사람의 머리는 비슷한 관념적 유집통계식(perceptual cluster statistic)으로 정보를 받도록 되어있다”고 말한다. 그의 비판은 할데인의 비판의 재현인데 모든 과학적 진보가 개별적인 관찰자의 동의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화학 원소간의 차이는 우리의 머리가 물질을 그런식으로 감지하도록 되어있어서 구별되는가?)  다른 것이 없다면 이러한 일치되는 분류는 다른 종류의 분류 (화학 물질같은)처럼 명확하게는 못하더라도 종이 실제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를 제시한다.  우리는 일반인들에게 그 지역에 서식하는 모든 생물체를 놓고 분류의 7가지 수준 (계, 문, 강, 목, 아, 속, 종)으로 분류하라고 요청한 후 이를 서구식 분류학과 비교함으로써 마지막에 제시된 이 생각을 시험할 수 있다. 나는 종에 대한 일치성은 높은 수준의 분류단위에서는 없어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마도 더 확실한 방법은 한 지역에 나타나는 생물체들을 형태적, 유전적 다양성을 유집분석 (cluster analysis)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분석자체가 그룹들을 분리시키려고 고안된 방법들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방법으로 없는 그룹을 만들어낼 수 없다. 동소적 그룹 간에 형태적 유전적으로 상당히 확실한 차이를 드러나게 하는 여러 가지 다변량 분석 방법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형태적으로 다른 것이 이미 확인된 종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고 보통 두 가지의 그룹에 한정된다. 우리는 한 서식지에 사는 모든 식물, 동물 (조류)에 대하여 그러한 분석을 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메이어 자신도 통계적인 연구는 아니지만 용감하게 이런 실험을 하여 메사츄세츠주의 콩코드의 식물의 90.8%가 분명히 다르게 구분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 자신의 의견도 종의 실존이 어떤 누구라도 상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명하다는 도브잔스키의 관점과 누군가가 몇 가지의 동소적 그룹에 대하여 자세한 연구를 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바람과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참나무같은 식물 종들은 종들 간에 경사를 이루며 상호교잡 단위를 형성한다는 식물학자들의 계속되는 주장을 미루어 볼 때 그러한 연구는 식물에서는 특히 유용할 것이다. 그러한 많은 종의 복합체라는 것도 사실은 한 종이 강력한 서식지의 도태에 의하여 단 몇 가지의 특성만이 분화되어 형성된 서로 다른 생태형일 가능성도 상당히 많다.

 종의 실존에 관한 풀리지 않은 한 가지 주요 문제는 뚜렷하게 구별이 되는 그룹들이 무성생식하는 분류단위에서도 나타나는지의 여부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왜 생물의 모양이 종간에 그룹간에 연속성이 없는지, 특히 유성생식과 서식지 환경의 차이 중 어느 것이 더 기여를 하는지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단지 몇몇 진핵생물에서만 이 문제에 대한 연구가 수행되었다.  홀만(Holman 1987)은 무성번식하는 한 식물 (Bdelloid rotifers)은 유성생식하는 근연종과 비교할 때 훨씬 실 수 없이 식별해 낼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형태학이나 유전학적 근거로 도출된 것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분류학적 이름을 개칭하는 것을 통한 명칭의 안정성에 근거를 두고 얻어진 것이다.  토툴라 (Tortula)속에 속하는 이끼들을 분석한 결과 미슬러(Mishler 1990)는 종 별로 10에서 20개체 정도씩 조사하였지만 무성생식하는 2종과 유성생식하는 2종의 집단 간에 나타나는 형태적 변이의 양이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런 종류의 실험이 분류학적 기준을 쓰지 말고 표현형적 (phenetic) 기준을 사용하여 많이 실행되어야 한다.


2020년 1월 4일

(다음에 계속)